#. 1단계, 집착
수유거부부터 시작된 아이의 식이거부에 나는 집착해야만 했다.
엄마들은 아이의 배고픈 울음을 알아챌 수 있다는데...
난 도저히 구분할 수 없었다.
열무는 시도 때도 없이 너무너무 많이 울었고, 단 한번도 그 울음이 수유로 해결 된 적이 없기 때문에 더 알 수가 없었다.
이번엔 배가 고파서 우는건가? 아니구나.
이번엔 진짜 배가 고파서 우는 거 아닐까? 아닌가보네.
배고플 시간이 한참 지났어. 배고파서 우는거지? 이번에도 아니야!?
양껏 먹고 난 뒤에도 운다면 다른 울음이구나 하고 알겠지만,
애초에 먹지를 않으니
점점 아이의 울음소리에 항상 내 머릿속에는 "배고픔"이 따라붙어 노이로제가 되었다.
이유식으로 넘어갔을 때도, 나는 집착해야만 했다.
열무가 걸핏하면 토하고 못먹고 거부했기 때문에 이 거부의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내야 했다.
안 먹는거니, 못 먹는거니. 아직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이.
그래서 더 열심히 다양한 음식들로, 다양한 방식으로 시도하고 시도해야했다.
뭐라도 먹을 수 있는 걸 찾으면 그걸 실마리로 하여 안 먹는 것, 못 먹는 것의 단서를 찾을 수 있을 테니까.
이러한 나의 집착은 점점
그동안 내가 주장했던 육아이론들을 부정했다.
식탁에는 장난감이 올라오고, 아이가 먹는 양에 연연하고, 강요하고, 화를 내고...
주위에서는 나를 비난했다.
그렇게라도 먹여야겠니. 유난이다. 네가 아이를 더 예민하게 만들어.
애가 못 먹는게 아니라 네가 못 먹는 아이 취급할 뿐이야.
나는 그들의 말이 틀렸다고 장담하면서도, 괴로워했다.
정말 이렇게까지 먹여야하는 걸까. 전쟁같은 식사시간을 끝내고 싶다.
병원에서 숫자로 보여주는 열무의 성장발달 상태는 먹는 것에 집착하는 나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몸무게와 키가 조금 부족하긴 했지만 큰 문제없이 적당하게 자라고 있었고, 심지어 피검사 결과도 정상이었다.
#. 2단계, 포기
약 1년 반 가까이 어떻게든 열무에게 먹이려고 했던 나의 지나친 집념은 마음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나아지는 것 없이 더더욱 심해져가는열무의 식이거부에
나는 극단적으로 포기선언을 했다.
굶어라. 먹지마. 배고프면 뭐라도 먹겠지.
지치고 화도 나고, 괘씸하고, 답답하고,
한편으로는 혹시 이게 먹힐까 하는 기대감도 일말 있었다.
그 결과, 열무는 정말로 안 먹었다.
물론 마지못해 먹을때도 있었으나 다른 아이들 처럼 드라마틱하게 잘 먹거나 하는 것은 아니고
맨밥을 물에 말아 떠먹여 주면 조금 먹을 정도.
어쨌거나 식사시간에 스트레스를 안 받으니 아이와 웃는 일은 많아졌다.
그래서 이게 옳은가보다 했다.
더군다나 문제없이 아주 잘 크고 있잖아?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밤중에 깨어나 한없이 울었다.
물이나 좀 먹여야겠다 싶어 물병을 쥐어줬는데 물병을 쥐는 아이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낮에 유독 못 먹고 잠든 날이긴 했다. 설마... 배가 고파서?
울음을 진정시키고 냉장고에서 케익을 꺼내어 좀 먹어보라 줬더니
힘이 없는지 숟가락을 잘 쥐지도 못하고 힘겹게 케익을 떠먹으려고 애를 쓴다.
아...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소위 우리가 당 딸려서 손이 떨린다 하는, 그런 바들거림.
물에 밥을 말아 직접 떠먹여줬더니 한 그릇을 뚝딱하고 이내 잠이 들었다.
열무가 한 마디씩 배워나갈 무렵, 밤마다 물을 지나치게 찾아서 참다참다 크게 혼낸 적이 있다.
잠들기 전에 물을 찾아서 금방 물을 먹이고 눕혔는데 또 물을 달라는 것이다.
자기 싫어서 별 핑계를 다 대는구나 싶어 혼내는데
열무가 엉엉 울면서, 배고파서요. 라고 했다.
그동안 시도때도 없이 물을 찾던 열무가 오버랩 되면서 가슴이 꽉 막혔다.
핑계가 아니라 진짜 배가 고픈 거였다.
곤히 잠든 아이를 바라보는데, 마음이 너무 아팠다.
요즘 같이 먹을 게 넘쳐나는 시대에 배가 고픈 아이라니.
#. 3단계, 타협
점점 시간이 흐르고, 열무를 오래 관찰할 수록 열무의 식이거부가 예민함과 밀접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민한 아이들이 식이를 거부하는 케이스가 많았다.
어른들에겐 미미한 향이나 특정한 맛이 아이에겐 너무 과해서 고통스러울 수 있다고 한다.
고기나 채소들이 원하는 만큼 잘게 씹히지 않고 되려 뭉치거나 입에 오래 머무를때 공포를 느낀다고 한다.
비위가 지나치게 약해서 젖병이나 젖꼭지를 빨 때, 음식물을 삼킬 때 힘들어 할 수 있다고 한다.
아마도 열무는 소화기관도 약하고 비위가 약하니 분수토를 그렇게나 시도때도 없이 했을것이고,
분수토처럼 계속되는 부정적인 경험으로 수유거부와 식이거부를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맛있기만 한 간식들, 심지어 아이스크림, 주스, 과자, 빵, 사탕까지도 열무는 못 먹는 일이 허다했는데
내가 느끼는 감각의 100배로 열무의 미각이 공격 받는다고 생각하니 이제야 열무의 반응이 이해가 되었다.
열무는 못 먹기때문에 안 먹는 것이었다.
책에서 본 푸드네오포비아 라는 낯선 단어, 그게 바로 내 아들에 관한 이야기라니.
왜 나는 이제야 알아차린 걸까. 속상하고 한탄스러웠다.
열무는 그동안 먹는 것이 즐거울 수가 없었던 건데.
애초에 다른 보통의 아이들과 비교할 수가 없는 상황인 건데.
내가 더 극한 상황으로 밀어넣은 것만 같았다.
열무의 식습관에 대한 나의 생각을 다시 고쳐먹었다.
아이가 먹는 것에 마음을 내려놓되, 아이가 점점 개선 될 여지가 있도록 이끄는 것에 목적을 두기로 했다.
건강한 식품들로만 먹이고자 하던 내 욕심도 내려놓았다.
첫번째, 배고프면 물이 아닌 뭔가를 먹어야 한다는 걸 가르쳐주자.
두번째, 먹는 다는 것이 즐거운 일임을 알려주자.
세번째, 입안이 다양한 자극으로부터 익숙해지도록 오래오래 천천히 노력하자.
이 세가지를 지극히 열무의 입장에 맞추어 실행하자.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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